명의신탁 부동산을 둘러싼 27년만의 반전, 배임 행위와 가등기 무효의 법리
부동산 거래나 문중 재산 관리 과정에서 '명의신탁'은 생각보다 흔하게 발생하는 형태입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타인의 이름을 빌려 등기를 마쳐두는 것이지만, 세월이 흘러 수탁자가 변심하거나 독단적으로 재산을 처분할 때 걷잡을 수 없는 법적 분쟁이 발생하곤 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사례는 무려 27년 전 설정된 가등기를 근거로 소유권을 주장한 종중과, 이를 배임 행위로 규정하여 맞선 매수인 간의 치열한 법적 공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명의수탁자의 배신 행위가 어디까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지, 그리고 '적극 가담'이라는 법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는 '서원(B단체)'이라는 명의신탁자와 그 구성원인 '종중원 I'가 있습니다. 서원은 과거 자신들의 소유 부동산을 관리의 편의상 종중원들에게 명의신탁하여 등기를 해두었습니다.
- 배신 행위의 시작: 명의수탁자 중 한 명이었던 I는 서원의 허락 없이 자신이 대표자로 있던 'A 종중(피고)' 앞으로 부동산 지분 1/4에 대한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를 설정해주었습니다.
- 소유권의 회복과 매각: 이후 서원은 명의신탁을 해지하고 부동산 소유권을 되찾아 새로운 매수인(원고)에게 이를 매도했습니다.
- 본등기의 실행: 매수인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치자마자, 잠자고 있던 27년 전의 가등기가 깨어났습니다. 피고 종중이 이 가등기를 근거로 본등기를 실행하며 지분 1/4의 소유권을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정당하게 대금을 지불하고 부동산을 매수한 원고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원고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 명의수탁자의 임의 처분은 배임: 수탁자 I가 신탁자인 서원의 동의 없이 가등기를 설정한 것은 신임 관계를 저버린 명백한 배임 행위입니다.
- 반사회적 법률행위: 특히 가등기 당시 I가 피고 종중의 대표자였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종중이 수탁자의 배임 행위를 단순히 아는 수준을 넘어 '적극 가담'한 것이므로, 민법 제103조(반사회적 법률행위)에 따라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 부동산실명법 위반: 실명법 유예기간 내에 실명등기를 하지 않은 가등기는 효력을 상실했으므로, 이에 기반한 본등기 역시 원인 무효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피고인 종중 측 역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맞섰습니다.
- 채권 담보 목적: 수탁자 I가 과거 서원의 복원 공사비를 개인 자금으로 충당했으며, 그 비용을 담보받기 위해 가등기를 설정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대표자 동일성의 정당성: 종중 명의로 등기를 한 것은 개인 명의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다른 종중원들과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 배임의 의도는 없었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 기판력 주장: 본등기가 이미 법원의 화해조서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며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웠습니다.

이 사건은 상급심으로 갈수록 법적 쟁점이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 화해조서의 효력을 중시했습니다. 이미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진 화해조서가 있으므로, 원고의 말소 청구가 적법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 또한, 가등기가 서원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아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 배임 행위 인정: 명의수탁자가 신탁자 몰래 가등기를 해준 것은 명백한 배임이라고 보았습니다.
- 적극 가담의 법리 적용: 가등기 권리자인 종중의 대표자가 바로 배임 당사자인 I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법인은 대표자의 행위를 통해 움직이므로, 종중이 이 배임 행위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 반사회적 무효: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는 무효이므로, 이에 터 잡은 가등기와 본등기 모두 말소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사건의 판결은 부동산 명의신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법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 배임 행위의 정의: 명의수탁자가 신탁자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등기를 넘기거나 담보를 설정하는 것은 형사상 배임죄에 해당할 뿐 아니라, 민사상으로도 불법행위가 됩니다.
- 제3자의 책임 범위: 일반적으로 제3자가 수탁자의 배임 행위를 알면서(악의) 매수하더라도 계약은 유효한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제3자가 수탁자를 꾀어내거나 처분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경우에는 민법 제103조 위반으로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 대표권 남용의 효과: 법인의 대표자가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 대표권을 남용하고 상대방이 이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 그 행위의 효력은 법인에 미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습니다.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부동산실명법)은 명의신탁 약정을 원칙적으로 무효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처럼 종교단체나 종중, 배우자 간의 특례가 적용되는 경우 실명법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실명법상의 특례와 상관없이, 신뢰 관계를 악용한 '배임'과 이에 편승한 '반사회적 가담'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27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더라도 원인 무효인 등기는 언제든 바로잡힐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부동산을 매수할 때, 등기부등본상 매도인이 실제 소유자가 아니거나 과거 명의신탁 관계가 얽혀 있다면 극도로 주의해야 합니다.
- 히스토리 파악: 가등기가 설정되어 있다면 그 원인 채권이 무엇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 실제 권리 관계 확인: 서류상 등기권자와 실제 점유 및 관리자가 다를 경우, 신탁 관계 해지 여부를 서류로 증명받아야 합니다.
- 전문가 자문: 종중 재산이나 단체 재산은 내부 의결 절차가 필수적이므로, 이와 관련된 서류가 구비되었는지 법률 전문가의 검토를 받는 것이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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